십 년도 훨씬 더 넘게 지난 일이다. 신경림 시인이 1998년에 낸 책 '시인을 찾아서'를 자취방에서 읽던 시절이 있었다. 방배동의 설계사무소를 다니며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지친 몸을 누이던 때였다. 당시 유행했던 '느낌표' 선정도서인 그 책을 뜬금없이 사서 본 기억이 난다. 페이지를 넘기다 유독 눈에 띄었던 시인은 김종삼. 신경림 시인이 고른 그의 시는 당시로서는 참으로 충격이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어쩌면 이렇게 간결한데도 선명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어떤 그림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시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북 치는 소년에서 연상되는 원통형 빨간 모자, 타닥타닥 울렸을 테두리가 붉은 북, 카드에 멀리 배경으로 등장할 법한 산타클로스의 빨간 외투....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저건 붉다고 말하지 않아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풍경 속 빨간 색, 색, 색. 한 편의 시로 촬영한 겨울의 컬러사진 한 컷이었다.
그러다 재작년인가 점심 먹으며 보려고 사무실 경향신문을 들고 나갔다가 무심히 시 연재 코너로 눈이 닿았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시인이 누군지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마도 시를 읽으니 불현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흑백의 정경과 뒤통수를 치듯 슬몃 몰려오는 애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밥상 앞에서 신문 펼쳐놓고 보다가 기습을 당한지라 아차 싶었다. 누가 흉볼까 뻐근한 눈가를 서둘러 비비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야 알고서 더 놀랐지만 이 시도 역시 김종삼 시인의 것이었다. 그 뒤 고민없이 사놓은 김종삼 시인의 시집에서 요즘도 이 대목을 읽으면 추운 겨울날 빛바랜 흑백 사진에 대책없이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시집 뒤편에 있는 황동규의 평론 "잔상의 미학"에서는 김종삼의 시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김종삼 시인)가 노리는 것이 잔상 효과이기 때문이다. 언어 습관이나 일상 생활 면으로 보면 꼭 있어야 할 것을 꼭 있을 자리에서 빼버리고 그 빈자리에 앞서 나온 시행들의 울림을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의 관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그는 이 관성의 특징을 이용하고 있다. (92-93쪽)
시인이 슬쩍 꺼내 놓은 사진 두 장을 보다가 슬그머니 심상이 옮아오면서 여기저기 요동이 인다. 파문은 사면팔방으로 퍼지는데 정작 상황을 정리할 시어는 생략되어 있다. 싯귀는 단출해서 벌써 막바지인데 이미 속도를 받은 마음은 관성 탓에 멈춤 없이 여백으로 내달린다. 그러다 흰 여백 위 꽈당 넘어진 자리에 잔상이 남는다. 흑백 또는 천연색의 잔상.
시집에 실은 황동규의 평론에서는 김현의 평을 빌어 김종삼 시인의 시 세계를 방황이라고 설명했다. 시집 뒤 연보의 짧은 생에서 알 수 있듯이 요령없이 가난한 시인에게 무례한 세상은 살아 생전 늘 불화의 대상이었으며, 문학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내면을 탐구하는 그룹과 현실에 참여하려는 그룹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희귀한 보헤미안 생존자(98쪽)"였다고 한다.
하지만 크로키보다 더 크로키 같은 시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왠지 과묵하니 술 좋아했을 것 같은 시인이 오래 전에 발 디딘 저 세상에서 자신이 그린 풍경처럼 때로는 호젓하고 때로는 찬연하게 빛을 내길 빌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삶이란 구구절절한 사연, 굳이 그런 '내용 없이' 아름답게.
[150705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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