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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으로 쓰기/정원과 공원

정원야근(庭園夜勤)

by deli-space 2013. 6. 2.

정원 설계하면서 야근할 일은 좀처럼 드물다. 물론 다른 여러 프로젝트가 본의 아니게 겹쳐서 단기간에 설계할 도면이 많아지면 밤늦게까지 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원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도면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일시에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약 2~3년에 걸쳐서 설계와 감리가 복합적으로 천천히 진행되는 탓에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정원 시공도 마무리로 접어든 고성리에서 건축주의 연락이 왔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봐도 정원이 너무 어둡다는 것인데 저녁때 해질 무렵 현장으로 와서 야외 조명을 켜놓고 꼭 같이 보자는 이야기였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가족 몇몇만 사는 곳이라 야외 조명은 크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설계 초기부터 조명 숫자를 최소화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건축주도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도면대로 시공한 후 식재공사를 포함한 기타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개인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주의 취향! 정원에서 실제로 조명을 보면서 최종적으로 보완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이 당연히 가장 합리적인 수순이다.

결국 현장에서 저녁 때 건축주, 시공업체, 설계자가 모두 모여서 직접 육안으로 확인을 하고 조명을 보완할 위치와 조명기구의 형태를 대략 정리했다. 비교적 넓은 정원 곳곳에 모든 조명을 켜고 나니 낮에만 보던 정원과는 천지 차이였다. 챙겨간 카메라로 구석구석을 찍어두었는데, 며칠 지나서 주말에 이 사진 파일들을 옮겨서 훑어보다가 갑작스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떠올랐다.

 

마치 두 개로 막 분리되는 듯한 달의 모습(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임)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밤하늘이 평소에 보던 밤하늘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가 여느 때와 다르다. <...>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

하늘에는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작은 달과 큰 달. 그것이 나란히 하늘에 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2009), 《1Q84: BOOK 1, 4月-6月》, 문학동네: p.418

 

한 수 배운 것은 설계, 감리 과정에서 이런 야근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다음부터는 아예 우리가 먼저 나서서 현장에서 조명을 실제로 켜놓고 야경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정원 설계란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은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야하는 일인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밤에 보는 정원은 생각보다 근사한 공간이다. 밤 풍경을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카메라의 노출 덕분에 돌연 빛이 튀어 오르는 듯한 이미지들을 얻은 것도 또 다른 수확이다.

 

 

 

 

 

튀어오르는 빛

 

솔직히 사진 찍는 실력이 엉성한 탓에 얻은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내 카메라로 이렇게 직접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얻은 게 새삼스레 신기할 따름이다. 사진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발 맞추기 위해서는 마무리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시로 해두는 게 좋겠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E. Y. Har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무라카미 하루키(2009), 《1Q84: BOOK 1, 4月-6月》, 문학동네: p.5

 

참, 한 가지만 덧붙여두자. 이 멋들어진 시가 노래 가사라는 사실은 책을 한참 더 읽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점. 그 증거로는 주인공 아오마메가 낯선 남자를 유혹하려는 장면에서 불쑥 등장하는 다음의 짤막한 두 문장. “밴드는 <이츠 온리 어 페이퍼 문>을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1절만 노래했다”(같은 책, p.124)

 

[정원야근(庭園夜勤)_13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