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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쓰기/역사

[고대라틴아메리카]티와나쿠1: 문명의 발전과 농업

by deli-space 2013. 7. 15.

티와나쿠

Tiwanaku

 

출처: 아래 텍스트와 그림, http://en.wikipedia.org/wiki/Tiwanaku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보호지역(UNESCO World Heritage Site)

티와나쿠: 티와나쿠 문명의 영적, 정치적 중심지. 세계 문화유산 목록(World Heritage List)에 등재한 명칭임.

국가: 볼리비아

유네스코 지정 지역: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해 지역

등재 시기: 2000

위치: 남위 16°3317, 서경 68°4024

 

<태양의 문>

 

티와나쿠(스페인어: 티아와나코 또는 티아와나쿠, Tiahuanaco and Tiahuanacu)는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서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중요한 고고학적 대상지이다. 안데스 지역 관련 학자들은 티와나쿠가 훗날 잉카 제국을 낳은 가장 핵심적인 선구 문명 역할을 했다고 본다. 티와나쿠는 행정과 제의(祭儀)의 기능을 담당하는 국가 권력의 수도로서 약 5백 년 동안 번성했다. 이 도시 국가의 유적은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 라파스(La Paz)에서 서쪽으로 72킬로미터(45마일) 떨어진 티와나쿠 자치지방 잉가비 지역(Ingavi Province)의 라파스 현()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Lake Titicaca)의 남동쪽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스페인의 정복자이며 자칭 "인도제국에 대한 최초의 연대기 작가(first chronicler of the Indies)"라고 했던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Pedro Cieza de León)이 역사상 최초로 티와나쿠를 문자로 기록했다. 레온은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야수유(Qullasuyu)를 찾다가 1549년에 티와나쿠의 유적을 우연히 발견했다. 몇몇 사람들은 티와나쿠의 현재 이름이 아이마라 족(볼리비아와 페루의 인디오)의 말인 타이피콸라(taypiqala)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단어는 "중심에 놓인 돌"이라는 뜻인데, 티와나쿠가 세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믿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전 티와나쿠 사람들이 그곳을 부르던 이름은 영원히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티와나쿠 사람들은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문명의 발전과 농업

 

 

티와나쿠 주변 지역에는 기원전 1500년부터 인간들이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티와나쿠가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서기 300~1000년의 시기인 티와나쿠 4기와 5기에 관한 것이다.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300년 사이에 티와나쿠는 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정신적, 우주적 중심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주론적인 명당이라는 개념이 티와나쿠의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는 전조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 1945년에 아르투르 포스난스키(Arthur Posnansky)는 기원전 15000년경 티와나쿠에서 천문고고학적인 기술을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훗날 포스난스키가 티와나쿠의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서 사용한 기법을 재평가한 결과, 천문고고학 전공 학자들은 이런 추정이 오류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포스난스키의 추정은 "천문고고학적인 증거를 오용한 유감스러운 사례"라며 입을 모았다.

 

호수와 건조한 산악지대 중간에 위치한 티와나쿠의 입지적 특성 덕택에 여기 살던 사람들은 어류, 야생 조류, 식물, 라마(llamas) 같은 낙타과 동물을 유목하는 땅 등 핵심적인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티티카카 호수 유역은 풍부한 강수량을 예상할 수 있는 매우 풍족한 환경이다. 티와나쿠 문명은 이렇게 얻는 물을 농업에 활용하는 법을 발전시켰다. 티와나쿠 지역에서 동쪽으로 더 이동하면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이 나타나는데 아주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다. 티티카카 호수 유역은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범람에 의한 충적 평야(flooded-raised field)" 농업(현지어로는 수카 콜루스, suka kollus)으로 알려진 독특한 농경 기술을 개발했다. 티와나쿠 지역에서는 관개 농지, 목초지, 계단식 농지, 쿠오차(qochas, 인공 연못) 등과 함께 이런 기술을 활용한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흙을 쌓아 올린 들판 사이마다 물로 가득한 얕은 수로가 지난다. 이 수로를 통해서 무럭무럭 자라는 작물에 수분을 공급한다. 뿐만 아니라 수로의 물이 낮 동안 태양의 복사열을 흡수한다. 매섭게 추운 밤 동안에는 복사열을 조금씩 다시 방출한다. 티와나쿠 지역에서는 고유의 기후 특성으로 인해 서리가 내리기도 하는데, 수로는 이런 서리로부터 열을 보존하는 단열재 역할을 한다. 볼리비아 북부의 라노스 데 목소스(Llanos de Moxos region, 목소스의 아마존 강 유역 범람원) 지역에서도 이러한 경관 관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수로에 식용 어류를 넣어 기르고 수로에 생기는 슬러지를 거름으로 뿌리기도 했다. 들판이 점점 넓어져서 티티카카 호수의 전체 수면 면적(8,135 제곱킬로미터)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주요한 기능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이런 농지들의 규모나 모양은 서로 달랐다.

 

노동집약적이기는 하지만 수카 콜루스 농법은 매우 풍부한 생산량을 자랑한다. 티와나쿠 지역의 전통 농법으로 헥타르 당 2.4톤의 감자를 생산하며, 현대 농법(인공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으로는 헥타르 당 14.5톤의 감자를 생산한다. 여기에 비해 수카 콜루스 농법을 사용하면 헥타르 당 무려 21톤의 감자를 수확할 수 있다.

 

1980년대 시카고 대학의 앨런 콜라타(Alan Kolata)와 오스왈도 리베라(Oswaldo Rivera)가 다시 만든 실험용 농지에서도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은 바 있다. 1988년 한파로 인해 티와나쿠 지역의 생산량 중 70~90%가 동사했지만, 실험용 농지의 생산량은 고작 10% 감소했을 뿐이었다. 농업 문명에서 이렇게 식물에 해를 입히는 서리에 대한 대응 방법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수카 콜루스 농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직업적인 구분이 생겨났다. 사회의 각 구성원들은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훗날 잉카에서처럼 티와나쿠에는 상업이나 시장과 관련된 제도가 거의 없었다. 대신 엘리트 계급의 재분배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 근본적으로는 제국의 엘리트 계급들이 경제적인 전체 생산물을 관장한다. 하지만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평민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직업 중에는 농민, 유목민, 목축업자 등이 있었다. 직업의 분화와 함께 제국 안에서 위계적인 계급화가 이루어졌다. 티와나쿠의 엘리트 계급은 해자(垓字)가 있는 네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았다. 이러한 해자를 통해서 신성한 섬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벽 안쪽에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이런 이미지는 엘리트 계급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시작을 표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는 것은 오로지 엘리트들만의 특권이었다. 성벽 안쪽은 최고의 신이 머무는 성지였기 때문에 평민들은 의례적인 목적을 제외하고는 절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