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는 기원전 1350년부터 줄곧 군사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은 주변보다 기온이 낮고 무성하게 숲을 이룬 경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수렵생활에 알맞았다. 그런 까닭에 포도 덩굴에서부터 수렵원에 이르기까지 조경은 평화를 상징하는 예술(peaceful arts)이 되었다. 게다가 정복지에서 삼나무, 회양목과 외래 동물 등을 들여와서 더욱 풍성해졌다. 니네베에서 볼 수 있듯이 호화로운 궁궐 벽을 장식한 부조 판에는 ‘사냥’, 꼭대기에 나무를 심은 궁전을 배경으로 한 ‘낚시’, ‘왕의 정원 연회’ 등의 그림을 담았다.
(The Landscape of Man: p27)
1853년 12월 지금의 이라크 모술 인근 쿠윤지크(Kuyunjik)에서 고대 서아시아 역사의 비밀을 밝힐 중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수천 년 전 도시 이름은 니네베(Nineveh).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최강국 아시리아의 수도였다. 발굴 성과는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재위 BCE 668-627?)의 궁전이었다.
궁에서 발굴한 벽체 부조 중에는 정원에서 벌인 연회 장면이 있다. 왕이 포도주 잔을 든 채로 왕비와 마주보면서 비스듬히 앉은 모습이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터를 잡았던 수메르나 바빌론에서는 대추야자를 주로 가꿨지만, 이보다 기후가 서늘한 아시리아에서는 포도를 재배하여 날로 먹거나 술을 담갔다. 제각각 튼실하게 자란 나무들이 드리운 정원 그늘 아래서 하인 여럿의 시중을 받으며 더없이 평화롭고 나른한 오후를 즐겼으리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주거지에 정원을 가꾸고 즐겼다는 점이 부조 그림을 통해서 여실히 증명된다. 게다가 이 광경을 정교한 미술작품으로 묘사해서 후대에 전하려 했으니 ‘평화’와 ‘예술’이라는 찬탄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놓쳐선 안 되는 디테일. 부조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 나무 가지에는 고리에 걸린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엘람 족의 왕 테우만(Tuemman)의 목이었다. 사실 ‘정원 연회’는 아시리아 왕이 이민족을 물리친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알고 보면 왕의 정원 풀밭 위로 뚝뚝 듣는 선혈이 낭자한 비정한 잔치. 폐허가 된 적국에서는 절망과 비통의 울음소리가 가득했을 테고. 아시리아가 전쟁에서 저지른 학살, 약탈, 이주의 만행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기원전 870년경 아슈르나시르팔 2세(재위: BCE 883-859)는 포로의 귀와 코, 사지를 잘라내고 눈을 뽑아냈으며, 죄수는 불에 태워 죽이고, 반란군은 산 채로 가죽을 벗겼다. 끝까지 저항한 수괴의 벗긴 가죽을 니네베 성벽에 걸어 놓기도 했다니, 정원 나무에 매달린 수급 정도라면 그나마 꽤 무난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 해야 할까.
외래 동식물을 들여왔다는 내용도 문구 그대로면 오늘날의 무역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정복한 땅을 철저히 유린한 후 적지의 나무를 가릴 것 없이 벌채하거나 이식하는 전쟁 약탈 행위였다. 3천년 전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재위: ?-BCE 1102?)부터 앞서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사르곤 2세(재위: BCE 722-705), 센나케리브 왕(재위: BCE 705-681)에 이르기까지 아시리아 군대가 짓밟은 땅에서 유실수, 허브를 비롯한 외래 식물이나 희귀한 나무를 들여와서 궁궐에 옮겨 심거나 수렵원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집한 나무 이름을 긴 목록으로 나열한 경우도 있었다.
나무가 자체로 신성한 상징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귀중한 전리품으로서 실제 쓰임새도 많고 과시 효과도 컸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베어낸 적국의 목재로는 거대한 왕궁을 지었으며, 탈취한 희귀 식물을 모은 정원에서 아시리아의 드넓은 강역을 자랑했을 것이다. 또 수목을 대량으로 베거나 옮기면 대지가 황폐화되기 마련이다. 재해에 취약한 폐허를 쉽게 복구하지 못한 채 적들은 오래도록 비참한 세월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아슈르바니팔을 그저 포악한 고대 왕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내 선왕들 중에는 누구도 서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인 것을 자랑스레 여겼으며 실제 언어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필경사 교육을 받은 덕분에 수메르 어와 아카드 어로 쓴 설형문자 필사본을 죄다 읽을 수 있었고 수학 문제까지도 풀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무려 42년 동안 옥좌에 앉아 있으면서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당시에도 2천 년 전인 수메르 인에 관한 문서 등 설형문자 기록을 수집하고 필사해서 니네베의 왕립 도서관으로 모았다.
다양한 형태로 고안된 서법의 신, 나부 신의 지혜를 나는 서판에 담았으며, 서판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순서를 맞추었다. 왕으로서 묵상과 암송을 하기 위해 나는 서판들을 내 왕궁에 보관했다.
(알베르토 망구엘: p105)
훗날 발굴한 궁전 중 ‘사자사냥의 방(Lion-Hunt Room)’이라는 곳에서 놀랍게도 당시 도서관을 발견했다. 장르에 따라 수집품을 분류한 최초의 도서관이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왕립 도서관이다. 설형문자로 쓴 점토 판과 파편이 3만 점도 넘게 나왔다. 역사, 행정, 법, 편지, 예언, 주술, 의학, 문학 등 수많은 텍스트 중에는 천지창조 설화, 대홍수 이야기, 길가메쉬 서사시 등이 있었다. 그 곳에 모은 자료들이 결국 19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발견되었으니 메소포타미아의 텍스트와 문화를 길이 보전하려던 왕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거대한 제국의 말로는 허무했다. 두 아들이 왕권을 놓고 내전을 벌이더니 기원전 627년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후 고작 15년만에 아시리아는 멸망했다. 근대 발굴에서도 수난이 이어졌다. 당시 대영제국 고고학자들은 왕의 도서관에서 나온 자료를 따로 구별해 두지 않았다. 유럽 반출 후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점토 판과 뒤섞여서 다시 정리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또 다른 방식으로 침략과 약탈 행위를 선보인 근대 제국주의의 결과로 이 유물들은 현재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Library of Ashurbanipal)’이라는 이름의 컬렉션으로 원래 위치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고이 모셔져 있다. [최종수정 210817]
<참고문헌>
Geoffrey & Susan Jellicoe, 『The Landscape of Man: Shaping the Environment from Prehistory to the Present Day(3rd ed.)』, Thames & Hudson: London, 1995, p27
아서 코터렐 지음, 김수림 옮김, 『아시아 역사: 세계의 문명 이야기』, 지와 사랑: 서울, 2013: 50~52쪽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밤의 도서관』, 세종서적(주): 서울, 2011: 50~52쪽
https://en.wikipedia.org/wiki/Ashurbanipal
https://parksandgardensuk.wordpress.com/2014/10/11/tiglath-pileser-i-the-passion-he-shared-with-william-robinson/
http://www.britishmuseum.org/research/research_projects/all_current_projects/ashurbanipal_library_phase_1.aspx
[16022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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