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쓰기/역사

160221 불과 최초의 경관

deli-space 2018. 3. 6. 10:56

본능이나 외형이 원래 적응에 유리했던 유인원이나 원숭이 중에서도 숲에서 가장 잘 살아남은 것은 다른 종들보다 재능이 많았던 하나의 종(species)이었다. 기원전 50만 년 이 동물이 도구를 발명했고, 이제 인간으로서 거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환경에 적응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추어 환경을 바꿔나간 것이다.

(The Landscape of Man: p10)


인간이 의도적으로 바꾼 최초의 경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교적 넓은 경관에서 인식 가능한 변화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 불을 사용한 결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인류는 화산 폭발, 번개나 자연발화로 인한 화재 등을 겪으면서 불을 처음 접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대략 4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가 부싯돌을 이용, 불을 피우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30만 년 전이 되면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 등이 불을 일상적으로 사용했으며, 음식을 요리하고 온기와 방어 수단을 얻었다. 어두운 밤 시간과 추위가 혹독한 공간까지 인간 활동을 확장했고, 포식자를 불로 위협하여 순식간에 생태계 먹이사슬의 정점에 섰다.
 
후기 홍적세(洪積世, Pleistocene Epoch) 12 7천 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불을 이용한 지식으로 손잡이 달린 도구를 생산한다. 불은 그야말로 도구를 만들어내는 도구였다(패멀라 D. 톨러; 27). 긴 시간이 흐르면서 불을 이용한 제련법을 개발하여 도구와 무기를 제작하고 다른 집단과 교역을 했다. 토기를 만들어 물과 음식을 저장하며 벽돌을 구워서 이후 숱한 건물과 도시를 세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불이 인류 진화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불에 익힌 음식을 먹으면서 날음식을 씹는 커다란 턱이 작아지고, 단백질 등 영양소 흡수 효율이 개선되자 뇌와 지능이 발달했다. 이런 진화 결과 현생 인류가 등장한다.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된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 지역을 떠나 대규모로 이동한다. 아라비아 지역을 지나 45,000년 전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호주에 상륙했으며, 16,000년 전에는 당시 뭍이었던 베링해협(Bering Strait)을 건너 약 12,000년 전에 드디어 남아메리카 남단 지역에까지 다다랐다. 
 
한편 유의할 점은 불이 주변 환경을 파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초기 인류 한 무리가 자연 발화로 시커멓게 탄 숲을 지나다가 그런 데서는 먹을거리를 보다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슷한 곳을 찾아서 헤매다가 얼마 후에는 아예 일부러 주변에 불을 질렀다.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불을 내면 들어가기도 힘든 잡목 숲이 사냥감을 쉽게 잡을 수 있는 훌륭한 초원으로 바뀌었다.
 
45,000년 전 처음으로 호주에 상륙했을 무렵 인간은 이미 불지르기를 이용한 사냥과 채취에 능숙한 상태였을 것이다. 낯선 대륙의 무성한 숲을 불태워서 탁 트인 초원으로 조금씩 바꾸어갔고, 초원의 동식물을 손쉽게 초토화시키는 식으로 삶을 영위했다. 불과 몇 천 년 지나지 않아 호주 대부분의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 시기 이 대륙에만 서식하던 대형동물들이 대규모로 멸종했다.
식물 화석에 증거가 남아 있다. 당시 호주에서는 유칼립투스(Eucalyptus globulus)가 드물었지만 인간이 도착하면서 이 종은 도리어 번성했다. 화재에 강한 유칼립투스와 그 잎만 먹는 코알라는 경쟁자나 포식자가 없어진 초원에서 서식지를 차츰 넓혀 갔다.



바라보는 주체로서 인간이 진정한 의미로서의 경관을 정의하는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면 최초의 경관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멀리서 보면 검게 그을린 덤불과 풀이 갓 돋아난 초원이 군데군데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인간이 의도적으로 바꾼 경관은 십수만 또는 수만 년 전 어느 날 그렇게 처음으로 출현했다. 인류가 숲에서 가장 잘 살아남았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지만그런 서술만으로는 부족하다인간은 끝내 살아남았지만, 생존 과정에서 환경을 급격히 변화시킨 결과 급기야는 자신의 터전인 숲과 숲에서 살던 다른 종들을 위협하는 치명적 존재가 되었다.


<참고 문헌>
Geoffrey & Susan Jellicoe, 『The Landscape of Man: Shaping the Environment from Prehistory to the Present Day(3rd ed.), Thames & Hudson: London, 1995, p10
Roebroeksa, Wil & Paola Villab, ‘On the Earliest Evidence for Habitual Use of Fire in Europe,’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08(13), 2011, http://www.pnas.org/content/108/13/5209.full#sec-8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김영사: 파주, 2015: 31-32, 109-110
패멀라 D. 톨러 지음, 안희정 옮김,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 도서출판 다른: 서울, 2014, 25-27
https://en.wikipedia.org/wiki/Control_of_fire_by_early_humans
https://en.wikipedia.org/wiki/Landscape
http://www.socwall.com/desktop-wallpaper/37597/after-the-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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