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Water Gate)_02
작금의 어이 없는 사태 탓인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이야기까지 되살아나서 간간히 귓가에 들려온다. 사실 오래 전부터 대체 왜 정가의 스캔들에 '워터게이트', '물 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바로 그 '물 문'을 언급하는 성경의 한 대목(느헤 8,1.3)을 듣게 되었고, 마침 검색한 인터넷 포스트가 있어서 연휴를 틈타 옮겨 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에 대한 답부터 먼저 밝히자면,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진 워싱턴 DC의 복합단지 또는 호텔의 이름 '워터게이트'는 여기 성경과 고고학 발굴에서 등장하는 '워터게이트(물 문)'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덕분에 성경에 나오는 2-3천 년 전의 건축과 구조물들을 고고학자들이 실제 발굴하고 연구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연구들이 이미 반 세기 전에 이루어졌다니 대단하다. 이처럼 오래된 텍스트가 물리적 실재로 눈앞에 드러난다는 것 자체도 신기한 일이지만, 유적에 대한 추론 과정에서 무리한 가정을 밝히고 조심스럽게 바로 잡아가면서 확인하는 과정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건축고고학(architectural archaeology)이라는 분야가 매우 의미 있는 연구들임을 알겠고, 관련된 웹진 기사도 나중에 들여다볼 생각이다.
The Water Gate of Jerusalem
https://www.ritmeyer.com/2011/06/22/the-water-gate-of-jerusalem/
린 리트마이어(Leen Ritmeyer, 1945-): 네덜란드 태생의 건축고고학자(archaeological architect)
오펠(Ophel, [1])에서 제1성전 시대(959BC-587BC)와 제2성전 시대(516BC-AD70)로 추정되는 복합 유적지의 개방(inaguration)이 널리 보도됐다. 우리는 이전 게시물에서 "이 유적지는 1970년대 故 벤자민 마자르(Benjamin Mazar) 교수의 지휘로 처음 발굴했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에일라트 마자르(Eilat Mazar)가 추가 발굴했다. 여기에는 고대 이스라엘과 헤로데 왕 시대의 (해체된) 유적, 그리고 로마, 비잔틴,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다."고 언급했다.

1975년 이 지역에서 헤로데 왕 시대의 저택 발굴을 감독했기 때문에 나도 이 유적지를 잘 알고 있다. 아내 캐슬린(Kathleen)도 같은 지역에서 발굴했다. 그 뒤 모셰 포이어(Moshe Feuer)가 감독을 넘겨받았다. 그는 헤로데 왕 시대 저택 아래에서 철기 시대의 견고한 구조물을 찾아냈는데, 벤자민 마자르 교수는 이것이 열왕기 하권 12장 20절에 나오는 '밀로궁(The House of Millo, cf. 21절 내용. "요아스(843BC-796BC)의 신하들이 일어나 음모를 꾸미고, 실라로 내려가는 그를 밀로궁에서 죽였다.")'이라고 잠정 확인해주었다.
이 개방 소식을 전하면서 토드 볼렌(Todd Bolen)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졌다.
"에일라트 마자르가 자신이 발굴한 구조물을 문으로 식별한 것에 동의하는 다른 고고학자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몇 년 전에는 그녀 견해에 가장 공감하는 부류들조차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혹시 그게 바뀌었을 수 있다. 보도 자료에 문임을 분명히 적시하지 않고, 문이라고 '마자가 주장한다'고 한 것을 눈여겨 보고 있다."
이 질문에 답할 작정이다. 이 지역을 그린 워렌(Warren)의 평면도를 연구하던 중, 발굴 유적이 거대한 탑 모양 구조물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명확해졌다. 워렌은 그 탑을 "도드라진 탑(The Tower that lieth out)"(느헤 3,26)이라고 불렀다. 도로 반대편에 위치한 이 곳을 발굴하려 했지만 중세 유대인 묘지가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당국이 제지했으며, 나중에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됐다.
10여년 뒤 벤자민 마자르 교수와 그의 손녀 에일라트의 지휘 아래 제1성전 시대의 거대 구조물이 발견된 동쪽으로 발굴 작업이 확대되었다. 이전에 발굴된 지역을 에일라트가 조사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평면도를 작성하라고 했다.
평면도를 만들면서 나는 유적에 대칭성을 부여했고, 당시에는 모셰 포이어가 발굴한 구조물이 관문(gateway)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벤자민 마자르 교수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언제나 매우 즐거웠다. 우리가 열었던 숱한 '브레인스토밍' 회의에서 자주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다. '문'이었음을 증명하려는 발굴 위치를 가리키면서, 마자르 교수의 손녀 에일라트에게 그 문에 대한 사전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에일라트는 가능성을 조사하는 대신 다음날 언론을 불렀다. 자신이 '물 문(워터게이트, Water Gate)'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1986년 4월 22일자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 기사를 보자.
<예루살렘 포스트>는 "마자는 이 지역이 토라(Torah, 모세 오경)에서 솔로몬의 성전이 나오는 절(verse)에 묘사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펠에 사는 성전 막일꾼들과 함께 동쪽 ‘물 문’ 앞과 도드라진 탑까지 손질하였다.'(느헤 3,26) 이 지역에 미크바오(mikvaot, 유대교에서 정결 의식의 하나로 몸을 물에 담그는 목욕시설)가 많기 때문에 '물 문'이라고 불렀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정말 무지한 주장이다. 토라에 솔로몬의 성전(960BC 무렵 솔로몬 왕이 건립한 제1성전, 토라가 아니라 열왕기 상권, 역대기 하권에 나옴)과 느헤미야서가 들어있지 않을 뿐더러, 느헤미야 3장에서도 성전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 문(워터게이트)'과 미크바오의 연결은 성립할 수 없다. 이 '문'은 제1성전 시대(First Temple period)에 속하고 미크바오는 제2성전 시대(Second Temple period)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미크바오는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된다.

나는 문제의 건물이 문이라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여러 방들이 철기 시대의 방들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온전한 방에는 역시나 관문에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저장용 대형 항아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제 이 건물은 가정용 또는 공공의 대형 건물과 연결된 저장 시설로 보일 것이다.
느헤미야기 3장 26절을 읽어보면, '물 문'과 '도드라진 탑'은 성벽을 따라서 서로 분리된 장소임이 확실하다. 그래서 워터게이트는 그 탑의 남쪽(기혼 샘(Gihon Spring) 근방 어딘가)에 위치해야만 한다. 워렌의 발굴에 따르면, 이 '도드라진 탑'은 거대한 탑과 그보다 작은 L자형 성벽(워렌이 '보축된 탑(Extra Tower)'이라 부르던)의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L자형 성벽은 보다 큰 탑을 보강하기 위해서 지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는 구조물이 여럿 있는데, 에일라트에 따르면 이들은 기원전 10세기에 속한다. 그리고 아직 발굴하지 않은 '도드라진 탑'도 이 시대에 속하므로, 그렇게 본다면 L자형의 '보축된 탑' 구조물은 후대의 것이어야 한다.
제1성전시대 벳자타 못(Bethesda Pool)에서 나온 수로가 북동쪽에서 '도드라진 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나는 '물 문' 건물이 물 배급 장소(water distribution point) 역할을 했으리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히즈키야 왕(King Hezekiah, 717BC-698BC, [2])이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못으로 연결한 다음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오펠 지역에 물이 공급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이 곳에 새로운 물 배급 장소(저장용 항아리를 활용할 수 있는)를 지었을 것이다.
Q:
린에게
마자가 발굴한 유적지 근방 어디에도 '물 문'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곳이 아니라 기혼 샘 근처 도시 동쪽으로 훨씬 더 나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물 문'을 라이히(Rony Reich, 1947-,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발굴자)와 슈크론(Eli Shukron,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 발견한 "샘 건물(Spring House)"과 관련 지어서 생각하는 건가요?
또 벳자타 못(Bethesda Pool, [3])이 기혼 샘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는지 확인할 수가 없네요.(제가 단순히 오독한 게 아니라면요.)
정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캠(Cam)으로부터
A:
캠에게
저는 '물 문'이 동쪽 성벽에 위치한다고 믿지만, 논란이 되는 지역의 남쪽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 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기혼 샘에 더 가까워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샘의 탑(Spring Tower, [4])'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요.
벳자타 못은 제1성전 시대에 이미 있었습니다.(예를 들면 단 바하트(Dan Bahat)의 <Illustrated Atlas of Jerusalem> 28쪽 참조) 이 저수지는 당시 '양의 못(Sheep's Pool)'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수로가 이 연못 남쪽에서 '신전 산'의 동쪽 성벽을 따라 '도드라진 탑'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수로가 G구역까지 더 이어졌을 수 있어요.
Q:
린에게
간단한 질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워터게이트를 재건한 적이 있는지부터가 궁금해요. 느헤미야기 3장 26절을 여러 번 읽었는데도 워터게이트를 다시 세웠다는 언급은 찾지 못했어요. 제가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문이 다른 지점, 제 생각에는 '도드라진 탑'의 반대편에 있다는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느헤미야기 8장 1절과 3절의 "'물 문' 앞 광장"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게 '물 문'을 다시 세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다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는 뜻일까요? 말씀하시기 어렵다는 점 인정합니다. 그렇죠?
브렌트(Brent)로부터
A:
정말 답하기 힘드네요. 느헤미야기 3장 26절을 통해서 '도드라진 탑'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다른 구조물들도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느헤미야기 3장에서 성벽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재건했을 수도 있겠지요. 느헤미야기 8장 1절과 3절의 광장은 '물 문'을 미처 다시 세우지 못했더라도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NOTE.
[1] 예루살렘 남쪽 다윗 성(City of David, 가장 오래된 정착지로서 성경의 예루살렘)과 북쪽 성전산(Temple Mount,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이며, 기원후 70년 로마인들이 파괴) 사이의 지역.
[2]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열왕기 하권 20장 20절) 기원전 701년 남 유다 히즈키야 왕은 아시리아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려 하자 기혼 샘에서 티로포에온 계곡의 실로암 못까지 수로를 만들어 물이 성벽 안으로 흐르게 공사를 했다. 당시 기혼 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인데 다윗의 도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예루살렘의 성 안으로 끌어들이고 밖의 샘을 메워 버렸다.
[3] 벳자타 못을 처음 만든 시기는 기원전 8세기로 본다.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대던 저수지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이사 7,3-4)가 이곳이었다고 본다.
[4] 라이히와 슈크론은 기원전 18세기 가나안 족속들도 기혼 샘 주변을 요새화하고 반석을 깎아 웅덩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요새화한 그 구조물을 '샘 건물" 또는 "샘의 탑"으로 부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