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예방을 위해 가끔은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걸어 버릇하란 얘기를 요사이 들었다. 굳이 이런 충고가 아니더라도 전부터 산책할 때는 낯선 길을 부러 택하곤 했다. 같은 길을 지루하게 매일 걷는다는 느낌이 덜해서 그랬던 것 같다. 걷다가 모르는 길을 발견하면 지도를 보지 않고 일단 걸어 본다. 뻗은 방향을 대충 따지고 원래 알았던 길과 만나는 지점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소소한 탐험을 즐긴다.
그러다가 얼마 전 개운산 자락을 거치는 새 코스를 찾았다. 아파트 쪽문에 접한 순환도로를 따라 돌다가 산기슭 어금버금 자리 잡은 개인주택들 사이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파른 비탈길과 콘크리트 계단들을 조금 참고 오르면 바로 숲길이 나온다. 지금 위치와 근방으로 뻗은 길들을 그려놓은 안내판들도 군데군데 있다. 숲길은 고려대 땅이며, 일대는 이름도 거창한 '참살이 학습 클러스터'란다. 추측컨대 학교 시험림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한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기울기가 만만한 계단을 몇 분만 더 걸으면 비탈진 너럭바위가 나온다. 예전에 석공들이 잘라내다 만 것인지 바위는 세로로 길게 켜가 난 듯한데 어디까지나 내 소견이라 믿을 수는 없다. 나중에 개운산 내력 같은 걸 봐야겠다. 거기서 중경의 아파트와 원경의 첩첩이 겹친 산들이 보이는데, 집부터 따져도 고작 이십여 분이니 다리 힘을 무리해서 쓸 일도 아니다.
너럭바위를 지나 고려대 안암캠퍼스 방향으로 숲 속을 걸으면 계속 내리막인데,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신갈나무가 무리 지어 저마다 영역을 나눴고 길가에는 산벚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따위가 나름 자리를 잡았다. 발길이 빤히 들락거린 데는 아카시나무, 붉나무가 틈을 찾아 뿌리를 내렸다. 울울한 수관을 올려다보거나, 나무의 잎이며 꽃이며 열매 이름들을 짚으며 내려오면 그게 또 이십여 분이 지나간다.
캠퍼스 문이 보이면 숲에서 나와 왕복 2차선 도로와 만난다. 여기부터는 목재데크를 깔아서 단정하게 조성해놓았다. 늘 흐뭇하게 바라보는 안전난간이 보이는데, 주변 자연을 배려하는 광경은 언제 봐도 가슴 푸근하다. 겸손한 이들의 품격이다. 길지 않은 데크 길의 끝에서 내가 원래 걷던 길과 합류한다. 주택가 좁은 길과 시장 골목 들이 이어졌던 산책 코스에 이제 숲길을 더해서 풍경이 여러모로 꽉 채워졌다.

로베르트 발저는 산책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산문 속 화자가 되어 어느 세무관리의 물음에 절절히 답한다.
그러자 위원장님인지 세금평가사님인지가 말하기를
"하지만 당신은 매일 산책이나 다니고 있잖아요!"
"산책은......." 나는 얼른 대답했다.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339쪽)
모로 가도 세계를 향해야 한다. 산책은 내가 세계와 허물없이 만나는 통로다. 야트막한 눈높이에서 삶의 찬찬한 속도에 맞춰서 두고두고 오래 들여다보고 그러다 때로 전경(全景) 또는 파노라마로 훤히 내려다보기도 하며, 이런 일을 어느 정도는 의무라고 느끼고 다짐하는 것. 자연과 인간, 삶이라는 세계에 관해서.
<참고문헌>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2017, 서울: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