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칭기즈칸과 금단의 무덤
실화: 칭기즈칸이 묻힌 금단의 무덤
Facts: Forbidden Tomb of Genghis Khan
출처: 모든 텍스트와 그림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웹 사이트의 다음 페이지(2011년 11월 2일 게재)를 번역해서 인용함
<말 위에 앉은 칭기즈칸(사진: NGT, National Geographic Television)>
1. 세계의 독립 국가 중 인구 밀도가 가장 희박한 나라인 몽골에는 면적 1제곱킬로미터당 약 1.17명의 사람이 분포한다.
2. 수도인 울란바토르(Ulaanbaatar)는 대략 백만 명의 사람이 사는데, 몽골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3. 초기 몽고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이었다. 오로지 사제(司祭)들만 접할 수 있는 강력한 혼령을 믿었던 것이다. 17세기 몽고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는 전통 샤머니즘과 결합되었다.
4. 몽고인들은 전통적으로 게르(gers)에서 살았다. 게르는 둥근 모양의 이동형 주거인데 말이나 낙타에 나누어 싣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다수의 몽고인들이 게르에서 산다.
5. 열 살 때 칭기즈칸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초원지대에 버려졌다. 이렇게 가장 곤궁한 처지에서 출발하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된 것이다.
6. 테무친(Temujin)은 대격변의 시대에 태어났다. 메르키드(Merkid), 케레이트(Kereyid), 타타르(Tatar), 나이만(Naymann) 같은 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다. 따라서 초원지대에서는 끊임없이 전투가 이어졌다. 1206년까지 테무친은 이러한 주요 부족들을 패퇴시켰고 몽골 전체를 통합한 후 자신이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스스로에게 '칭기즈칸(Genghis Khan)'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7. 1280년까지 칭기즈칸의 제국은 약 3천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했다. 이 제국은 동쪽으로는 황해(Yellow Sea)로부터 서쪽으로 지중해에 다다랐다.
8. 몽골 군대가 압도적 우위에 서게 된 핵심적 이유는 전력 질주할 경우에도 양다리만을 사용해서 말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탓에 전투 중 두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9. 몽골군은 공병 부대와 함께 기동했다. 공병들은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해서 교량, 사다리, 기타 장비 등을 신속하게 만들었다.
10. 대개의 경우 몽골군이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었고 장군들 중 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노래 형태로 명령을 하달했다. 익숙한 여러 리듬들로 내용을 만들어서 기억하기 쉽고 내용 그대로 정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
11. 몽골의 무인(武人)들이 죽음이나 패배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사한 동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피했다. 몽고인들은 죽음에 대해 단지 생각하기만 해도 실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다.
12. 몽골군은 선전전(宣傳戰)을 고도로 활용했다. 때로 몽골군은 자신들의 힘과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지어서 퍼뜨리기도 했다. 적들이 공포심과 혼란을 느끼게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13. 칭기즈칸의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를 연결했으며, 이는 실크로드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 때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로 칭하는 기간 동안, 칭기즈칸은 환경을 보호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진보적인 법률을 시행하기도 했다.
15. 당시 몽골에는 얌(yam)이라 부르던 매우 효율적인 우편 제도가 있었다. 이 우편 제도를 통해서 몽골 제국의 전역에 우편물과 보급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어떤 외교 관리가 사흘 동안 약 480킬로미터를 이동했다고 언급한 경우도 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이동 속도였다.
16. 칭기즈칸은 1227년 8월에 군사작전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여전히 신비의 베일 속에 남아 있다.
17. 칭기즈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온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사냥 중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무릎에 화살을 맞았다던가, 포로가 된 공주의 암살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등 여러 설들이 있다.
18. 칭기즈칸 죽음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몽고인들은 난폭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심지어 칭기즈칸의 장의(葬儀) 행렬을 목격한 사람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