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걷다가/설계자의 밤, 九北星

근대: 공간에 대한 시간의 우위

deli-space 2025. 1. 28. 11:26

정헌목. <마르크 오제, 비장소>. 2016. 커뮤니케이션북스

p.004-05
"공간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한 일련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근대 이후 사회 이론들에서 시간이 항상 공간에 대한 우위를 점해 왔다고 주장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84)가 진단한 것처럼, 사회 이론 전반에서 "공간은 죽은 것, 고정된 것, 비변증법적인 것, 정지된 것으로 간주된 반면 시간은 풍요로움, 비옥함, 생생함, 변증법적인 것으로 간주(Foucault, 1980:70)되는 경향이 있었다. (...) 에드워드 소자(Edward Soja, 1940-2015)는 근대 사회 이론이 '주로 시간의 해석적 맥락 속에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와 생성(becoming)을 위치시킴으로써 형성되는 역학 관계를 통해 세상을 이해'(Soja, 1989/97:21)해 왔다면서, 공간성이라는 요소가 비판적 사회 이론에서 시간에 종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공간이 갖는 학문적 유용성이 정치적, 실천적 담론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1935-)는 공간보다 시간에 우위를 두는 이론적 경향은 비판적 사회 이론의 목적이 '진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회 이론은 '항상 사회의 변화와 모던화, 그리고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기에'(Harvey, 1989/2005:254), 공간과 장소에서의 '존재'보다는 시간을 통한 '생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오랜 세월 동안 인간 활동의 한계로 작용해오던 공간과 이동의 제약을 극복하고, 시간과 속도와 진보를 우위에 둔 것은 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대의 핵심 키워드는 '진보'였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에서는 그 가능성에 대한 긍정과 열망과 흥분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광기와 우연의 역사: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2024. 하영북스. e-book

p.373-77 of 646
"17세기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카이사르의 군대보다 더 빠르게 진격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대 역시 칭기즈칸의 군대보다 빠르지 못했다. 넬슨 제독의 군함은 바이킹의 해적선이나 페니키아의 장삿배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바다를 건넜을 뿐이다. 바이런 경의 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에 기술된 지중해 여행을 보면 바이런 경이 하루에 이동한 거리는 유배지인 흑해로 가던 고대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하루에 이동한 거리와 큰 차이가 없다. 괴테가 18세기에 한 여행은 사도 바울이 1세기 초에 했던 여행보다 더 편안하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개개 나라는 로마 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각기 분리된 채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아직은 물질의 저항력이 인간의 의지력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 19세기가 되어서야 현실 속도가 그 척도나 리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변한다. 1800년에서 1820년에 이르는 기간에 개개 민족과 국가들은 지난 수천 년 전과는 비길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철도와 증기선이 생기면서 전에는 여러 날 걸리던 여행을 단 하루에 할 수 있고, 전에는 여러 시간 걸리던 길을 15분이면 갈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철도와 증기선이 가져온 속도의 혁신을 대단한 승리라고 여긴다. (...) 그러나 전기가 이뤄낸 최초의 성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급력을 갖게 된다. (...) 후세에 사는 우리는 전보가 처음 작동했을 때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놀라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이 발명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공간과 시간의 관계는 세계 창조 이후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겪는다. 1837년에 전보가 등장하면서 이제껏 분리된 삶을 살던 인류는 처음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츠바이크는 다음 부분에서 이 시절, 즉 19세기 초반을 바로 "진보의 시대답게"(p.379)라면서 상찬한다.

*알브레히트 폰 발렌스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 1583-1634): 신성로마제국의 명장이자 정치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오스트리아의 작가. 전기소설로 특히 유명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한 뒤 1934년부터 영국, 미국, 브라질로 망명을 떠났다.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유리한 전황이 계속되자 절망하다가 1942년 2월에 아내와 함께 자살로 세상을 떠남.

<허연의 책과 지성: 슈테판 츠바이크>, 매일경제 2019년 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