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쓰기/역사

[고대라틴아메리카]티와나쿠2: 흥망사

deli-space 2013. 7. 17. 19:10

티와나쿠

Tiwanaku

 

*모든 텍스트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Tiwanaku

 

 

2. 티와나쿠의 흥망사

서기 400년경에 티티카카 호수 유역의 도시 국가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수도를 티와나쿠에 세웠다. 티와나쿠는 융가스(Yungas, 현재 페루에 해당하는 안데스 산맥 동쪽 사면)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 북부 지역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티와나쿠가 폭력적인 모습의 문명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티와나쿠는 식민지를 만들어서 무역 협정을 교섭하고(오히려 다른 문화권이 티와나쿠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국가적인 숭배 의식을 확립했다. 다수의 여타 문화권들이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티와나쿠로 편입되었다. 티와나쿠는 언제나 종교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강제력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티티카카 호수 유역 북부 지역의 저항은 여전했다. 몇몇 조각상의 기초를 조사해보면, 다른 문화권에서 돌들을 얻은 다음 모두 티와나쿠의 수도로 가져갔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지역들 위에 군림하는 티와나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돌은 티와나쿠 신들의 위치보다 낮은 자리에 놓았다.

 

티와나쿠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시기는 아키파나(Akipana)로 알려진 건축물의 꼭대기에서 희생 의식을 치를 때였다. 여기서 사람의 배를 갈라서 죽이고 곧바로 시신을 찢는다. 그리고는 다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놓아둔다. 이런 의식은 신에 대한 일종의 희생으로 여겨진다. 원래 티와나쿠 사회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희생물로 삼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에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희생된 사람 한 명은 티티카카 호수 유역의 토착민이 아니었다.

 

서기 600~800년에는 공동체 사회가 도시 규모로 성장했으며, 안데스 남부 지역에서 중요한 지방 권력이 되어 갔다. 연구 초기의 추정 결과에 따르면, 최대 규모로 따졌을 때 도시 면적이 약 6.5 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15,000~30,000 명의 주민이 여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최근 인공위성 영상을 활용해서 티와나쿠에서 주요한 세 계곡 주변에 버려진 채로 펼쳐진 수카 콜루스의 범위를 맵핑한 결과, 세 곳 모두 인구 수용능력이 285,000~1,482,000명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문화를 근절하지 않고 흡수하면서 제국은 계속 성장했다. 윌리엄 H. 이스벨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티아후아나코(티와나쿠)는 서기 600~700년에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공공 건축물에 대해 새로운 기념비적 기준을 확립했고 거주민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고고학자들은 티와나쿠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 문화권에서 들여온 도자기들을 매우 인상적으로 차용(借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티와나쿠는 제국 안에 있는 모든 도시들과 무역 활동을 하면서 권력을 획득했다. 최상층 계급은 모든 지역에서 생산하는 식량의 잉여분을 관장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얻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재분배했다. 라마를 기르는 유목민을 관리하는 일이 티와나쿠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이들이 중심지와 주변부 사이를 오가면서 상품을 운반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라마는 일반 서민과 최상층 계급 사이의 거리를 상징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서기 950년 무렵까지 자원의 잉여가 늘어나면서 최상층 계급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 시기에 극적으로 기후가 변했다. 이런 현상은 티와나쿠 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티티카카 호수 유역에서 강수량이 급감했는데, 일부 고고학자들은 대가뭄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강수량이 점점 줄어들수록 티티카카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대다수의 도시들은 최상층 계급에게 보낼 작물을 거의 생산할 수 없었다. 식량의 잉여분이 줄어들자 최상층 계급의 권력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강수량이 줄어들어도 쌓아올린 농지는 회복력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티와나쿠의 수도는 그나마 생산력을 지니고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농지의 지혜로운 디자인도 날씨에게는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제국이 지닌 권력과 권위의 원천이었던 식량 생산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서기 1000년경 티와나쿠는 멸망했다. 이 땅에는 여러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다. 우로스(Uros) 부족처럼 티와나쿠의 몇몇 후손들이 고립된 곳에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티와나쿠 도시국가의 북쪽 변경 너머에서는 13세기 초에 잉카 제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다.

 

서기 1445년에는 파차쿠티 잉카 유팡키(Pachacuti Inca Yupanqui, 9대 잉카)가 티티카카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티와나쿠 문화 양식이 남긴 것들을 통합하고 발전시켰으며, 당시 지역적인 특색에 잉카의 공식적인 요소를 덧씌웠다. 케추아 말(Quechua)이 공식 언어가 되었고 태양 숭배가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로써 티와나쿠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통합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